홈 > REVIEW > REVIEW
REVIEW

<시간 에이전트>(2016) - ‘블록버스터’ 대신 ‘마음’으로 완성한 ‘걸작 SF’

감독
전주영 (Jude Chun)
시놉시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미래에서 온 에이전트. 미래로 다시 돌아가려면 그냥 기다리는 방법 밖에 없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야한다. 혼자 있는것에 익숙해진 에이전트는 어느날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소녀와 마주치는데...
영화감상
http://bit.ly/2yK1aZ7

SF, 즉 공상과학물을 평소 관심이 많은 터라 자주 이 장르의 영화들을 항상 찾아보는 편이다. 화려한 새로운 기술들의 향연을 보여주는 미래 사회를 그린 ‘유토피아/디스토피아 SF’에서부터, 우주를 여행하고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는 ‘스페이스 SF’, 그리고 황폐해진 묵시록의 미래 세계에서의 생존 액션을 그린 ‘포스트-아포칼립스 SF’까지 다양하게 장르는 즐긴다. 그러나 이런 SF 서브 장르들 중에서 가장 매혹적이면서 그만큼 진중히 다뤄져 온 서브 장르는 아마 ‘타임슬립 SF’, 즉 시간여행 장르일 것이다. 시간여행은 그동안 인류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열망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물리학자들, 또 이 상상력을 다루는 공상과학 작가 및 영화감독 수 만명들 사이에서 이론이 내세워 지고 글과 영상으로 펼쳐 보여졌다. 

 

a2ec10e2f462bd35c5e9b64f4a67ff1a_1509255583_9341.jpg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들은 많이 있다. 시간여행을 환상적으로 긍정적으로 다룬 <백투더 퓨쳐>, <이프 온리>에서부터, 암울하고 비극적으로 다룬 <터미네이터>, <12 몽키즈>, <루퍼>와 같은 작품들이 있다. 대다수 관객들은 시공간을 이리저리 뛰어넘는 상상력을 다뤘다는 점에서(혹은 SF 장르라는 점에서) 이 장르의 영화들이 보통 블록버스터급 고예산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라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영화들 중 <백투더 퓨쳐>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저예산, 중예산으로 만들어진 소박한 영화들이다. 이들은 그리 크고 거대규모의 볼거리나 스펙터클한 시간여행 과정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시간여행이라는 설정 하나만 가지고 과거와 미래 간의 열결이 어떻게 이어지고 뒤틀리는가에 대한 긴장감으로 밀고 나간다. 사실, SF 장르도 대규모가 아니더라도 매우 소박한 규모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며, 그만큼 얼마든지 걸작으로도 만들 수가 있다. 

 

a2ec10e2f462bd35c5e9b64f4a67ff1a_1509255338_2872.jpg
 

<시간 에이전트>는 그의 가장 모범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맨 인 블랙>이나 <인셉션>을 연상시키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는 자신이 미래를 바뀌기 위해 과거 현재로 시간여행을 해온 에이전트라며 나레이션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빗속 한 가운데서 지켜보고 있는 한 여인의 미래 이야기를 몽타쥬로 풀어 보이며 영화를 시작한다. 여인 연아는 좀 있으면 우산을 건네줄 남자 수빈과 만나 이 일을 계기로 다른 연인들이 그러하듯 여러 경험을 하며 친해지다 끝내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다. 그리고 에이전트는 그 아기가 미래에 294명을 죽게 한다고 나레이션 설명을 한다. 충격적인 나레이션이 마치자마자, 다시 빗속에서 에이전트가 연아에게 먼저 우산을 빌려주어 수빈과의 만남을 막는다. 범상치 않은 이 오프닝에서부터 영화는 별다른 특수효과 볼거리 없이 시간여행물 특유의 상상력과 필수 정보를 손쉽게 제공해주고 있다. 

 

에이전트는 미래의 범죄와 재앙을 막기 위해 과거인 현재 2015년에서 혼자 조용히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또 어떤 미래 범죄의 계기가 될 한 부부의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몰래 침입해 마치 불륜의 흔적을 연상시키는 흔적들을 조작해 놓고, 다시 어두운 자취방으로 돌아와 외로이 지내는 것이 매일의 일과이다. 그는 이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그 어떠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남들과도 섞이지 않으며 조용히 도시와 사람들 틈새에 숨어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강 다리를 건너다 투신 자살을 하는 여고생 이슬과 실수로 눈이 마주쳐 버린다. 절대 미래를 바꾸지 않게 하기 위해 모른척 넘어가려다가 세상을 향한 외로움과 원망에 찬 이슬의 매정하다는 호통에 못 이기고 결국 죽었어야 할 이슬을 다리 난간에서 내려다 준다. 

 

앞의 나레이션에서 미리 얘기한 것처럼, 스스로의 선택이나 운명이 순간들이라 믿는 모든 것이 사실 그렇게 유의미하지 않고 사소하고 무의미한 요소들이 우연적으로 집합하여 만들어낸 인과적 산물이라 주장하는 전제에서, 이 작은 일 하나에 이미 완벽히 임무에 실패한 에이전트는 어쩔 수 없이 이슬을 자신의 자취방으로 데려온다.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 이슬의 질문에 처음에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미래에서 과거로 온 공무원과 같은 직업이며 자신이 현재 년도에서부터 19년 뒤 결혼하고 이혼한 뒤 임무를 위해 여기 과거로 돌아왔다는 과거사를 설명해준다. 믿는 둥 마는 둥 하던 이슬은 남자의 정체보다는 남자의 결혼에 대해 더 묻는다. 다음날 아침, 원래 그 다리에서 죽었어야 할 이슬로 인해 미래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에이전트는 우유에 몰래 독을 타 이슬에게 건넨다. 아직 살지 다시 자살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이슬은 결정하는 일주일 동안만 같이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고민하던 에이전트는 이슬의 다정한 요청 끝에 못 이겨 또다시 임무를 번복하고 이슬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주게 된다. 

 

a2ec10e2f462bd35c5e9b64f4a67ff1a_1509255357_4877.jpg
 

 

둘은 일주일을 보내면서 함께 집 정리를 하고 식사하고 부부의 집을 드나들며 미래를 바꿀 흔적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이슬이 함께하며 남자의 자취 일상을 더 활동적이게 해주고, 부부의 집에서도 더 도발적으로 흔적을 만들어 내는데 도와준다. 그렇게 둘은 마치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딸 같은 분위기로 친밀해진다. 그리고 일주일 뒤, 이슬을 고민 끝에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결정을 묵묵히 듣던 에이전트는 조용히 이슬에게 다시 독을 건넨다. 고통 없이 조용히 잠들다 죽을 거라는 에이전트에 말에 긴가민가하던 이슬도 독을 마신다. 곧 죽을 이슬과 정들었던 그를 떠나보낼 에이전트는 서로 껴안으며 위로의 시간을 보내고, 이슬의 죽음이 늦춰지자 둘은 마지막 식사까지 해본다. 에이전트는 그동안 아껴두던 고추 참치를 이슬에게 건네주고, 이슬은 마지막 잠자리에서 에이전트에게 지금 그가 생각하고 있는 여인처럼 자기를 기억해 줄 거냐고 또 그만큼 사랑하느냐고 다정히 묻는다. 그제서야 둘은 전반부에서 느끼지 못하던 행복감과 연대감을 느낀다. 

 

앞서 말했듯 공상과학 영화들에 관심이 많이 자주 찾아보지만, 사실상 개인적으로 사랑한다 할 정도로 좋아하는 이 장르의 영화들의 수는 타 장르 영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특히 블록버스터 규모 영화들에서 더 그런데, 기발한 상상력의 볼거리로 화려함의 궁극을 보여주지만 드라마가 그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즉 눈이 즐거워도 그건 잠시일 뿐이지, 마음까지 움직이지 못하면, 돼지 목의 진주의 거대 버전을 보는 것 같은, 거대한 실패라고 느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정말 사랑하는 SF 영화들은 <백투더 퓨쳐>, <터미네이터> 1편, <엑설런트 어드벤처>, <루퍼>, <시간을 달리는 소녀> 등 소박한 규모에 볼거리보다는 SF 상상력을 업고 발칙하거나 힘 있는 드라마에 승부하는 독립영화, B급 영화들이 대다수다. 별다른 특수효과나 볼거리를 포기하면서도 누구나 간절히 꿈꾸는 상상력을 현실로 실현해 보이며 여러 감정의 드라마를 펼쳐 보이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영화로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이다. 

 

a2ec10e2f462bd35c5e9b64f4a67ff1a_1509255610_876.jpg
 

<시간 에이전트>는 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단편 독립 영화 특유의 저예산적 한계에서 드라마적 아이디어를 발산하며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 놓는다. 현실의 서울 도심 거리를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음울한 디스토피아처럼 보이게 하는 시각적 연출에서부터 일반 사람들과 대조되는 에이전트의 블랙 수트 의상, 균형잡힌 구도에서 스텝프린팅까지 동원하는 기발한 카메라 연출, 서로 다르면서도 어울리는 에이전트와 이슬간의 멜로드라마적 케미, SF와 어울리지 않는 트로트 노래 ‘신의 토로’가 그 케미에서 흘러나오는 시퀀스까지 모두가 불협화음으로 영화적, 장르적 재미를 더해주며 나름대로의 SF 정서를 (희한하게도)내뿜는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로 ‘자기만의 작가주의적 SF’를 만들어 낸 전주영 감독의 연출력과 사랑스런 두 주인공과 동화되는만큼 연기해 낸 최귀웅, 전영희 배우의 가능성을 봄으로서, 이들이 현재 부진한 우리나라 SF 장르에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재정적으로 위험한)큰 규모에 스펙타클은 아니어도, 나초 비갈론도나 미셸 공드리, 혹은 테리 길리엄 감독과 같이 소박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상상력의 SF, 환타지 장르들을 술술 만들어 내어 사랑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도 그런 SF 역시 사랑하니까.

 

 

후원현황
2,000

, ,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