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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리뷰와 감독, 배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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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2014) 리뷰 - 재림한 구세주는 축복일까? 지옥일까?

감독
나영길 (Na Young-kil)
배우
지혜찬, 박지환, 형영선
시놉시스
소년은 아프거나 다친 마을 사람들을 치유하고, 죽은 자들을 되살리며 살아간다. 치유 받거나 되살아난 사람들은 또 다시 되풀이되는 그들의 삶에 고통스러워하지만, 소년은 그의 치유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영화감상
https://bit.ly/2X3639V

재림한 구세주는 축복일까? 지옥일까?


[ 호산나 : 오,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뜻. 본래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시118:25)라는 짧은 기도문이며, 찬양의 외침으로도 쓰인다. 이는 메시야의 구원을 간구하는 동시에 그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격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21:9-15; 막11:8,10; 요12:13) ]

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교회용어사전 : 교회 일상, 2013. 9. 16., 가스펠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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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언제 어디서나 어떻게든 뜨거운 감자이다. 최근 국내 교회들에서의 비리와 사이비 단체 고발, 중동에서도 극단 이슬람 종파의 신앙전파라는 이름의 테러에 이어 불교권에서도 비리 큰 스님 뉴스까지 들려오자,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맑스의 어록을 들먹이며 종교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표출되고 있다. 물론 종교에 대한 논의는 이전부터 초현실적이고 현실과의 타협점 없다는 점에서 신학계에서마저도 해방이 논의되어 왔었다. 


과거 가톨릭 신도에서 무신론자가 된 입장에서 이런 해방 물결이 반갑기도 하지만, 혐오에 대해서는 아쉽기는 하다. 애초 나도 가톨릭-기독교 출신 배경인 점도 있겠지만, 일단은 종교가 인류 역사부터 문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끼친 문화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기에, 무조건적인 비관은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것을 무효화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의 역사 역시 종교, 그 중 기독교는 초창기 헐리우드에서부터 함께 해왔다. <십계>(세실 B. 드밀), <벤허>(윌리엄 와일러), <왕중왕>(니콜라스 레이) 등이 인기리에 제작되었고, 이후 파격적 변형을 시도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노먼 주이슨), <예수의 마지막 유혹>(마틴 스콜세지)까지 등장하였다. 그리고 잘 알려졌듯 이 영화들 모두 영화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그러다 80, 90년대 들어 현대판 성경, 예수 신화 영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만일 예수가 약속대로 현대에 재림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감독들이 실험하게 된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신비로운 남자를 둘러싸고 신앙심 두텁다 하는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지상에 떨어진 사나이>(니콜라스 뢰그), 범죄물과 SF 장르를 빌어 순교하는 경찰에서 로봇으로 부활해 다시 악을 심판하는 <로보캅>(폴 버호벤), 기계라는 고난에 갇힌 인류를 구원하러 절대자 ‘그(The One)’가 되는 <매트릭스>(워쇼스키 자매)까지. 서울 독립영화제에서부터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해 세상을 놀라게 한 나영길 감독의 단편영화 <호산나>도 현대판 예수 신화를 실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성적 폭력과 탐욕이 도사리는 척박한 대한민국 시골이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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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오프닝. 평화롭고 일상적인 시골 풍경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지는 가운데, 길 위의 살아있던 개구리가 그만 자동차 바퀴에 뭉개진다. 그 뒤 소년이 다가와 죽은 개구리를 두 손에 담아 감싸고, 무언가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 같더니 다시 되살아나 살아있는 개구리를 풀밭에 풀어준다. 강렬한 충격과 함께 주인공 소년을 죽은 이도 살려내는 기적을 보인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시키며 사작하는 영화는 “소년과 진씨”, “가겟집 아들 명근”, “소년의 혈육”, “임사장”, “진씨”, “명근”, “마을의 밤”까지 7개의 파트로 주인공 섭을 중심으로 한 시골 주변을 펼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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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이 어느 비닐하우스 집 안으로 들어간다. 엉망이 된 집 안에서 한 중년 남성이 피흘린 채 나체로 누워 있어 성기가 바로 보이는 또 다른 영상 충격이 펼쳐진다. 섭은 전혀 놀라지 않고 찬찬히 남자에게 다가가 겉옷으로 노출된 성기를 덮어준다. 곧 그 집 안 방에서 낯선 청년과 마주한다. 친한 이웃인 진씨는 섭이를 맞이하더니 피흘리며 나체로 아버지가 쓰러져 있음에도 놀라지 않고 그를 옮기자 한다. 


그가 아버지를 해쳤는지 의심가는 상황에서, 섭이는 별 의문없듯 이가 익숙한지 그 말대로 함께 아버지를 옮긴다. 진씨는 섭이가 고생이 많다면서 가게에 가보라 일러주는 동시에 미안하다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며 집을 나선다. 그 뒤 섭은 아버지 얼굴에 마치 세례를 내리듯 손을 얹어 주고, 잠시 뒤 의식불명 상태로 방 안에 누워만 있는 어머니의 기저귀를 정성들여 갈아준다. 이후 섭은 진씨의 말에 따라 가게로 가본다. 


가게에 가보니, 또다른 남자가 얼굴이 엉망인 채 누워있다. 남자의 옆구리에는 칼에 깊이 찔린 자국이 있다. 섭은 역시 놀라지 않고 앞서 아버지의 경우처럼 얼굴에 손을 얹는다. 그 옆에 남자의 어머니인 노파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보고만 있는 사이, 시골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뚱뚱한 남자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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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유명한 임사장이 가게로 들어오자 노파는 반갑게 맞이하고 임사장은 가게에서 술을 사가며 오늘 마을에서 잔치가 있다는 일상적인 대화들을 서로 던진다. 칼에 맞아 죽어가는 남자가 있고 섭이 상처를 치유하는 기적을 보이는데도, 둘의 대화는 이런 일이 너무나 익숙한지 태연하게 일상적이며 경제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섭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섭은 되살아난 아버지가 의식불명의 어머니를 겁탈하듯 관계를 하고, 그 직후 아버지는 허겁지겁 밥을 먹으며 자신을 되살려 준 섭에게 고마워하긴커녕 한 그릇 더 가져오라 명령부터 한다. 섭은 아무 대꾸 없이 그 명령에 따른다. 어머니가 방 안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 섭은 다시 어머니 얼굴에 손을 올려 기적으로 진정시키고, 곧 자신의 팔을 그러 흐르는 피를 그릇에 한 가득 담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당 미사에서 마음의 정결로서 성혈을 마시게 해주듯, 어머니에게 섭은 한숟갈씩 자신의 피를 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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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어머니는 안정이 된다. 이런 엄청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거실에서의 아버지는 개걸스럽게 밥만 먹고 개고기 한 더미를 가져온 임사장을 맞이하러 나가기만 한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섭에게 위압적으로 개고기를 씻기고 곧 잔치가 열리는 진씨 집으로 가져다 미리 끓여 놓으라 명령한다. 


역시 묵묵히 개고기를 씻긴 뒤 진씨의 집에 가져간 섭은 진씨가 자신의 성기를 찔러 자살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죄의식에 찬 얼굴로 고통스러워하는 진씨를 역시 놀라지 않고 보던 섭은 바로 조치를 취해준다. 소동이 끝나고 바로 아버지가 찾아와 진씨와 만난다. 진씨는 되살아났지만, 오히려 산 것이 괴로운 듯 무표정하게 섭이를 바라본다. 밤이 되고, 집에서 조용히 잠들던 섭은 갑작스런 아버지의 욕설과 고함 소리를 듣는다. 개고기 잔치에서 크게 술취 한 듯 거실 바닥에 아버지가 진씨가 널부러져 있다. 죽은 듯 꼿꼿한 누워있는 진씨를 다시 회복시키려 섭이가 그에게 손을 얹는다. 그 사이 왠 건달같이 생긴 남자가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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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낮에 되살려 낸 가겟집 아들 명근이다. 명근은 진씨가 잔치 중에 화장실에서 또 목을 맷다고 알려준다. “또”라고 말한 것을 보니 이번이나 오후에 자신의 성기를 찌른 일이 이전에도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명근은 바둥거리던 아버지와 똑같이 이런 일들이 지겨워 죽겠다고 말하고는, 멋대로 집 안에 들어가 밥과 함께 어머니도 잘 계시냐며 찾는다. 


그 사이에도 섭은 계속해서 조용하기만 하다. 곧 진씨가 다시 살아나지만 진씨가 다시 살아난게 괴로운 듯 날 뛰고, 결국 명근이 그를 달려주던 섭이를 밀쳐내고 진씨 얼굴에 술을 부어 약올리 듯 진정시킨다. 그리고 섭이에게는 술이나 더 사오라고나 한다. 역시 섭은 조용히 가게로 향하지만, 가게 앞에 왠 경찰차들이 모여 있고 임사장이 형님에게 미안하다 외치는 절규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일까? 누군가가 얼굴까지 천에 덮힌 채 구급차에 실려가고, 가겟집 노파가 경찰에게 부축받아 가고 있으며, 경찰이 위압적으로 돌아가라 하여 되돌아가는 섭이에게 임사장에 “다 너 때문이야!”라며 모욕과 함께 외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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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와 연상되는 국내영화가 있다. <불신지옥>도 신들림으로 기괴한 동시에 기적을 행사하는 소녀를 중심으로 광신적인 어머니와 속세를 욕망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름끼치게 그렸었다. 


물론 <호산나>의 주인공은 공포와 저주의 존재였던 <불신지옥>의 소진(심은경 분)과 달리 신비로우며 자기희생적이기까지 한 확실한 현대판 예수의 형상화이다. 개구리부터 사람까지 죽은 자를 살려내고 병을 치유하며, 심지어 자신과 약자들을 핍박한 원수들까지 도와준다. 신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사상 “원수를 사랑하라”의 완벽한 실천이다. 그리고 예수는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밀어라”라는 말을 빌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처럼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면 그 원수로 회개하고 선의 길로 갈 것이라며 그 사상의 이유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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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그가 현실에서 얼마나 통할까? <호산나>의 섭이도 그렇게 원수에게도 기적을 베풀어 주었지만, 원수들은 회개의 기미는커녕, 같은 악행을 반복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살려준 섭이을 향한 무시와 폭력도 계속된다. 그럼에도 섭이는, 예수나 다른 성자들의 경우와 같이 계속 원망도 복수는 물론, 요한계시록과 같은 심판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해서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자살하고 먹고 마시는 간음하는 탐욕을 즐기며 반복만 될 것이다. 결국 그렇게 기다리던 구세주가 재림하였지만, 그의 가르침이나 기적대로 통하지 않고, 우려하던 대로 남용되는 식으로 악이 반복되는 현실을 강조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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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종교에 대한 지적이 그래왔던 것처럼, 초자연적 기적에 대한 유무와 불문하고(또 이는 영화의 주제를 위한 부차적·장르적 요소일 뿐이다.), 그 덕이 실현되지 않고 오히려 탐욕과 폭력이 반복되고 마는 잔혹한 시골 내 사회를 영화는 마치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이나 <우묵배미의 사랑>과 같은 장선우 감독 영화처럼 극사실적 묘사로 들이밀듯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지저분한 미쟝센부터 깔려죽는 개구리에 피와 성기 노출까지의 영상충격을 가리지 않고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보여주지도 않고 주제와 맞춰 냉철한 만큼 안정적인 연출로 종교철학적 주제의식을 실험하는 감독의 실험정신이 놀라운 작품이었다. 더불어 주인공 섭이 역의 지혜찬 배우부터 명근 역의 박지환 배우까지 순수하거나 또 더럽다고 표현될 만큼 극사실적인 연기까지 역시 놀랍다. 


영화를, 그러니까 주인공 섭의 행적을 다 보고 나면(심지어 <불신지옥>과도 함께 보고 나면), 우리는 이런 의문에 다가서게 될 것이다. 과연 약속대로 예수가 지상에 재림해 온다면 그는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그 세상은 우리가 그토록 천상을 향해 꿈꾸던 천국일까 지옥일까? 영화는 정답을 바로 알려주지 않지만, 비관적인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이는 <불신지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성경에서도 보면 예수가 기존의 유대교 교리를 반박하고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알려주며 놀라운 기적으로 사람들을 치유해 로마가 두려워할 정도로 유대인들을 단결시켰지만, 오히려 로마 편에 선 같은 유대인 사제들로 인해 십자가형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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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생각하면, 기적의 주인공 섭이 고통을 받는 현실이 앞뒤 안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정말 재림한 예수이거나 혹은 새로운 구세주이든 상관없이 현실의 인류는 그의 기적이나 가르침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처럼 두려움에 경멸받거나 섭처럼 잦은 부패와 폭력을 피상적으로 해결하는데 이용만 될 것이다. 


결국 잔인한 십자가형을 받아야 했던 예수처럼, 섭이도 구세주로 받들여지기는 물론 가르침이 실천되긴커녕 그만큼의 고난을 받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교회를 위한다고 헌금제물을 걷어 내 사리사욕에 눈이 먼 목사들이나 천국이나 의 미있는 경지에 오르고자가 아닌 가족부터 자기 자신까지 잘 되고자는 이기적 심성으로 종교를 광적으로 섬기는 인간들의 현재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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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또한 예수가 기적을 보이고 가르침을 알려주지만, 그 행적을 기록하고 알리는 이들은 그의 열두 제자들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스승이자 구주의 가르침을 전파하여 똑같이 성인이 되었고, 그 가르침과 실천은 2천년이 지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결국 세상을 천국을 만드는 데서부터 예수의 재림까지를 진정 실현시키는 것,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로마서 7장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믿음을 넘어 육신의 죄, 탐욕과 속세에서 벗어나라는 뜻)의 실천은 현세의 우리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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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이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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